
출처: 청와대
1990년대 후반, 소련 해체 이후 독립한 우즈베키스탄의 거리에는 대우자동차가 가득했다. 한국의 대우와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공동 설립한 우즈대우자동차는 1996년 안디잔주 아사카 공장에서 넥시아, 티코, 다마스를 생산했다. 자동차 산업이 없었던 우즈베키스탄에 완성차 공장과 부품 산업이 들어섰고, 대우차는 사실상 ‘국민차’로 자리 잡았다. 이는 한국이 중앙아시아의 산업화 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의 성과는 지속적인 지역전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대우그룹은 IMF 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해체되었고, 이후 아사카 공장은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제너럴모터스의 합작회사로 재편된다. 한국 기업들은 이후에도 에너지·플랜트·자동차·전자·보건 분야에서 진출을 이어갔지만, 협력은 주로 개별 국가 및 사업 단위로 이루어졌다. 한-중앙아 관계는 정부가 바뀔 때마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신북방정책 등 정책의 명칭과 강조점을 달리한 채 의미 있는 지속성을 지닌 지역 협의체를 이루어내지 못했다.
그 사이 중국의 영향력은 빠르게 확대되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3년 카자흐스탄에서 ‘실크로드 경제벨트’를 제안한 이후 중앙아시아는 일대일로 구상의 핵심 통로가 되었다. 중국은 철도·도로·송유관을 비롯한 교통·에너지 사회기반시설 사업에 대규모 자본을 투입했고, 현재 중앙아시아의 최대 경제 파트너가 되었다. 2023년 시안에서 제1차 중국–중앙아시아 정상회의가 열린 데 이어 2025년에는 아스타나에서 제2차 회의가 개최되었다. 중국은 양자 간 경제협력을 넘어 중앙아시아 5개국을 포괄하는 정상급 지역협력의 틀을 구축한 것이다.
그러나 중앙아시아가 중국의 영향권으로 일방적으로 흡수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는 언어와 이주노동, 교역, 안보협력, 소련 시기의 제도적 유산을 통해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이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약해진 가운데,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기존의 다중벡터 외교를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중국, 미국, 유럽연합(EU), 튀르키예, 걸프 국가들과의 협력을 동시에 확대하고 있다. 이는 어느 한 강대국을 다른 강대국으로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협력 상대를 확보함으로써 전략적 자율성을 넓히려는 시도다.
최근의 정상외교는 이러한 변화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EU는 2025년 4월 사마르칸트에서 최초의 EU–중앙아시아 정상회의를 개최하고 양측 관계를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했으며, 교통·핵심원자재·디지털·수자원·에너지 분야에 120억 유로 규모의 투자계획을 제시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앙아시아 5개국 정상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핵심광물과 교통·에너지 협력을 논의했다. 러시아를 통과하지 않고 중앙아시아와 카스피해, 남캅카스를 거쳐 유럽으로 이어지는 ‘중간회랑(Middle Corridor)’의 전략적 가치도 높아졌다. 세계은행은 제도 개선과 인프라 투자가 뒷받침될 경우 중간회랑의 물동량을 2030년까지 세 배로 늘리고 운송시간을 절반으로 단축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이처럼 유라시아의 세력관계가 재편되는 가운데, 지난 9월 16일 서울에서 최초의 한-중앙아시아 정상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번 회의는 이른바 ‘C5+1’ 형식으로 열렸다. C5는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5개국을 하나의 지역 단위로 지칭하며, ‘+1’은 이들과 협력하는 역외 파트너를 의미한다. 개별 국가와의 양자협력을 넘어 공급망, 교통·물류, 기후변화와 같은 지역 공통의 문제를 한 테이블에서 다루는 협력 방식이다.
한국과 중앙아시아 정상들은 향후 30년의 협력 방향을 담은 「서울선언」을 채택하고 정상회의를 2년마다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정상회의가 개최되지 않는 해에는 외교장관급 협력포럼을 통해 합의사항의 이행을 점검하기로 했다. 「한-중앙아 산업 및 공급망 협력 MOU」 체결과 함께 산업장관 협의체도 신설되었다. 산업통상부는 정상회의 기간 정부 간 협력 문서 9건과 민간 비즈니스 MOU 116건이 체결되었다고 발표했다.
중요한 것은 MOU의 숫자가 아닌 협력이 지향하는 방향이다. 「서울선언」 제12항은 핵심광물의 채굴과 수입에 그치지 않고 가공, 산업 현지화, 과학기술 협력, 인적자원 개발을 포함하는 ‘공동 부가가치 생산망’을 구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우즈베키스탄과 체결한 「핵심광물 전주기 협력 플랫폼 MOU」 역시 희소금속센터를 기반으로 탐사·개발과 함께 가공기술 및 전문인력 양성을 추진하도록 했다. 이는 현지에 생산시설과 산업 기반을 조성했던 과거의 경험을 핵심광물과 첨단제조 분야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재현하려는 구상으로 읽힌다. 중앙아시아와의 협력은 한국에게 있어 선택 사항이 아닌 전략적 필요이다. 한국은 배터리·반도체·원전 등 첨단 제조업에 필요한 핵심광물과 우라늄·에너지의 공급망을 다변화해야 하며, 중간회랑을 활용해 유라시아 시장으로 향하는 새로운 물류 경로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중앙아시아가 한국의 기술과 산업화 경험을 필요로 한다면, 한국 역시 중앙아시아가 제공하는 자원·시장·연결성 없이는 경제안보와 대외경제의 다변화를 완성하기 어렵다.
한국은 러시아처럼 중앙아시아와 오랜 제국적·제도적 관계를 가진 국가가 아니며, 중국처럼 막대한 자본과 지리적 인접성을 갖춘 국가도 아니다. 미국과 EU처럼 역내 안보질서나 규범을 주도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의 차별성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한국은 직접적인 지정학적 위협이 아니면서도, 원조 수원국에서 제조·기술 강국으로 빠르게 고도성장한 경험을 보유한 국가다. 자동차, 전자, 플랜트, 디지털정부, 보건의료, 직업교육 분야에서 자본뿐 아니라 생산과 운영의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고려인 공동체의 존재와 한국 문화에 대한 높은 친밀도 역시 다른 역외 파트너가 쉽게 확보하기 어려운 자산이다.
이러한 강점을 실질적인 성과로 전환하려면 세 가지 노력이 필요하다. 첫째, 정부는 116건의 민간 MOU 전체를 형식적으로 관리하기보다 핵심광물 가공, 제조 AI, 교통·물류 등 전략성이 높은 소수의 대표사업을 선정해 집중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분산된 사업의 숫자보다 구체적 성공 협력 사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사업의 성과를 한국이 확보한 자원의 양이나 국내 기업의 수주액만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현지 생산과 고용, 기술이전, 공동 연구개발, 전문인력 양성 등을 함께 측정해야 한다. 이러한 지표가 포함될 때 ‘공동 가치사슬’은 외교적 수사를 넘어 양측이 공유하는 장기적 협력 자산이 될 수 있다.
셋째, 안정적인 이행 및 재원조달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대규모 자원·인프라 사업에는 장기간의 투자와 위험 분담이 필요하다. 한국의 정책금융기관과 아시아개발은행을 비롯한 국제금융기구를 연계하고, 산업장관 협의체와 코리아 데스크를 통해 사업별 추진 상황과 장애요인을 정기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그 결과를 공개함으로써 정상회의의 합의가 실제 계약과 투자로 전환되는 과정도 투명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다.
한국이 중앙아시아 국가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은 특정 강대국에 대한 의존을 또 다른 의존으로 대체하는 선택지가 아니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전략적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자원 수출국에서 산업국가로 전환하는 데 기여하는 유효한 협력 경로의 역할을 한국이 할 수 있다는 신뢰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2028년 카자흐스탄에서 개최될 제2차 정상회의에서는 새로 체결한 MOU의 숫자보다 서울에서 합의한 사업이 얼마나 현실화되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대우차 이후 30년, 한국의 중앙아시아 전략은 정상회의의 개최가 아니라 그 약속의 구체적인 이행을 통해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저자 소개
김선희(shkim_politics_rus@snu.ac.kr)
현)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강사, 고려대학교 국제학부 강사
전) 동아시아연구원(EAI) 선임연구원, William & Mary 정치학과 초빙조교수, Columbia University, Harriman Institute 박사후연구원
<주요저술>
김선희 (2025). “‘우리’가 된 난민: 우크라이나 난민과 폴란드 극우 정치의 역설.” 『슬라브학보』 40(1), 1-30.
Kim, Seonhee (2026). “Limits of Far-Right Mobilization in Poland: Incumbency, Threat Direction and Timing.” Asian Journal of Political Science 34(1), 28-43.
김선희 (2026). “정치담론과 제도: 러시아 종교 규제 강화의 담론적 조건, 2010-2019.” 『중소연구』 50(1), 99-150.
김선희 (2026). “우크라이나 전쟁 시기 러시아 정권 안정의 사회구조: 저항 집단과 동원 집단의 분리 (2022-2025).” 『슬라브학보』 41(2), 1-40.
관련 자료
관련자료
김경민·정동연 (2026). “제1차 한-중앙아시아 정상회의 성과와 시사점.” 『KIEP 세계경제 포커스』 9(66), 대외경제정책연구원, 9월 22일.
대한민국 및 중앙아시아 5개국 (2026). “제1차 대한민국–중앙아시아 정상회의 서울선언.” 서울, 9월 16일.
산업통상부 (2026). “한-중앙아 6개국 산업장관회의 개최, 다자 간 산업·핵심광물 협의 첫 발.” 보도자료, 9월 14일.
산업통상부 (2026). ”한-중앙아 5개국, 핵심광물 공급망·제조 AI 협력 기반 다졌다.” 보도자료, 9월 17일.
염재중 (2026). “한-중앙아시아 정상회의 ‘서울선언’ 채택…4가지 중점 주제 설정[전문].” 『조세일보』, 9월 16일.
외교부 (2026). “제1차 한-중앙아시아 정상회의.” 『2026년 정상 외교활동』, 9월 17일. 원출처: 청와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