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2025년은 1965년의 국교정상화로부터 60년, 광복과 분단으로부터 80년, 1905년 을사늑약으로부터 120년이 되는 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올해는 군함 운요호를 앞세운 일본의 무력도발과 이에 대한 조선 측의 응전이라는 불행한 만남으로 근대 한일관계사가 시작된 1875년으로부터 150년이 되는 해다. 이는 각각 한일 1965년 체제 60년, 분단체제 80년, 동아시아 패권체제 120년, 제국주의 국제법 체제 150년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로부터 올해 60년을 맞이하는 한일 1965년 체제가 세 개의 역사적 층위, 즉 ‘식민지주의-패권-분단’의 복합구조로 이루어진 질서임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봉인-경제분업-안보협력’의 한일 1965년 체제는 동아시아에 구축된 3층의 국제질서 위에 구축된 것이었다. 따라서 포스트 1965년 질서의 모색은 ‘탈식민-탈패권-탈냉전’의 과제인 것이다. 이를 확인해 주는 역사적 결절점인 2025년에 한국에서 새 정부가 탄생했다. 따라서 새 정부의 대일 외교는 150년의 시간을 단위로 한 거시역사적 문제의식에 입각해서 포스트 1965년 체제를 내다보고 마련되어야 한다. 동시에, 세 개의 층위를 오르내리며 복잡하게 얽힌 현안들에 대해서는 정밀하게 구상된 미시공학적 전략으로 접근할 것이 요망된다.
먼저 새 정부는 거시역사적 문제의식에 입각하여 ‘한일 1965년 체제’에 내장된 ‘역사화해-안보협력’의 딜레마를 이해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한일기본조약 제2조와 제3조 문제에 응축되어 있다. 제2조는 식민지배의 합법 불법 여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함으로써 과거사 봉인과 역사갈등의 기원이 되어 왔으며, 제3조는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대한민국의 지위를 인정한다는 기초 위에서 한일 안보협력을 강화하는 기원이 되어 왔다. 여기에서 한일 역사화해와 한반도 평화구축의 과제가 연계된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포스트 1965년 체제 만들기는 제2조와 제3조에 대한 한일 양국 정부의 엇갈린 해석을 일치시키는 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제2조 문제는 식민지배가 불법무효라는 한국 정부의 해석을 일본이 수용하고, 제3조 문제는 북한이 한반도의 또 다른 당사자로 존재한다는 일본 정부의 해석을 한국이 수용하여, 1965년 체제의 한계를 돌파하는 것이 과제다. 트럼프 발 관세 전쟁과 일본 발 ‘하나의 전장(One Theater)’ 구상 등이 식민-패권-냉전 구조가 만들어내는 자장에서 진행되는 것이라면, 1965년 체제의 한계를 돌파하는 과정이 바로, 이에 대한 대응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장기적 과제로써, 당장 풀어야 할 과제는 지난 윤석열 정부에서 엉켜버린 과거사 현안들이다. 그 해법 마련을 위해서는 정밀한 기획이 필요하다. 지난 윤석열 정부에서는 일본 기업의 책임을 면제해 주는 방식의 ‘제3자 대위변제’ 해법으로 강제동원 문제를 풀려 했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었다. 그 연장에 한일 준동맹화 움직임이 있었다. 12.3 계엄 선포와 내란 시도가 실패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이러한 움직임은 한일 수교 60주년을 기념한다는 명분으로 제도화 수순을 밟고 있었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 이후 한일관계에서 작용하고 있는 1965년 체제의 관성을 차단하고, 한일관계를 대전환의 시대로 진입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과거사 현안에서 일정한 해결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강제동원 문제 관련해서 ‘문희상 법안’을 보완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이는 과거 ‘기억 화해 미래 재단’의 설립을 구상한 ‘문희상 법안’에 ‘니시마쓰 건설(西松建設) 방식’을 결합시키는 것이다. 2007년 4월, 중국인 강제동원 노동자들이 니시마쓰 건설에 제기한 소송에 대해 일본 최고재판소는, 중일공동선언에 의거하여 개인 청구권은 실체적 청구권이 소멸했다고 볼 수 없다면서도, 재판을 통해 실현할 수 없다는 판단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이 소송에서 주목할 점은 일본 최고재판소가 ‘강제노동 사실’의 존재를 인정하고, ‘니시마쓰 건설이 피해 구제를 위해 노력할 것이 기대된다’고 권고했다는 점이다. 국가 간 조약과는 별도로 ‘가해-피해 사실’이 인정된다면 당사자는 실질적 구제를 위해 노력해야 하며, 정부는 이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된 사례다. 이 방식을 한일관계에 적용하여 조정, 활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는 ‘2015년 외교장관 합의’의 재전유(Re-appropriation)’라는 방법을 구상해 볼 수 있다. 이른바 ‘2015년 합의’는 ‘프로세스에 대한 합의’라는 점을 인정한 위에, ‘합의’에 따라 거출된 10억 엔의 ‘정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확인을 출발점으로 하는 것이다. 즉, 이 금액이 일본 정부가 일본군에 의한 전시 여성인권 침해 사실을 인정한 위에서 ‘일본 정부가 책임을 지고 사과하는 마음의 징표로서 일본의 예산 조치로 거출’하는 ‘배상의 조치’라는 사실을 ‘불가역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이를 전제로 일본 정부가 거출한 10억 엔의 잔여금(56억 원)과 여가부에 편성한 양성평등기금(103억 원)으로 ‘여성인권평화재단(가칭)’을 설립하고, ‘진상규명과 연구교육, 기억계승’을 위한 시설을 라키비움의 형태로 설립하여, 국제사회와 미래로 열린 해결의 거점을 마련하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해법들은 인적교류 1,200만 명 시대를 맞이하여 양국 국민 사이에서 정착되고 있는 우호적인 기류를 이어가는 과정에서 실행 가능하다. 동아시아연구원이 2013년부터 실시해 온 국민 상호인식조사에 따르면 일본에 대해 긍정적 인상을 갖는 한국 국민의 수가 올해 들어 63.3%로, 부정적 인상을 갖는 국민의 수를 넘어서는 골든 크로스 현상을 보였다. 또한 머니투데이가 한국갤럽과 함께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거의 90%에 이르는 한국 국민이 경제적 외교적으로 일본과의 협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국익중심 실용외교’가 대일외교에 적용되는 데 대한 국민적 지지도 확인된다.
그러나 같은 조사에서 많은 국민이 과거사 문제에서 원칙적 해결을 원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일관계의 방향성에 대한 견해를 묻는 설문에서 33%의 국민이 빠른 관계 개선을 위해 우리가 양보할 수 있다고 대답한 반면, 64%의 국민은 일본의 태도 변화가 관계 개선의 선결 조건이 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일관계에서 거의 대등해진 우리의 위상에 걸맞은 관계 개선을 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같은 조사에서 48%의 국민은 우리나라와 일본이 비슷한 선진국이라고 대답했으며,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선진국이라고 대답한 사람도 17%에 이른다.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선진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34%에 불과했다.
이러한 국민 의식을 고려할 때, 국익중심의 실용적인 대일외교를 중심으로 하더라도, 한일관계에서 식민지 지배에 기인하는 피해를 제대로 기억하고 피해자들을 정의로운 해결에 입각해 온전히 구제하는 일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시점에 이르렀다.
대선 정국에 돌입한 이래, 이재명 후보는 ‘국익중심 실용외교’를 대일 외교에도 적용하여 투트랙 기조 복원을 중심으로 하여 한일관계를 신중히 관리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이후에도 대일 외교에 대한 신중한 접근을 강조해 왔다.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서 “국가간 관계는 일관성, 특히 정책의 일관성이 중요”하다고 하여, “개인적 신념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거나 관철하기 쉽지 않다”라며 “가급적 국가 간 합의도 지켜지는 게 좋겠다”라는 생각을 피력하기도 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국가 간 관계에서의 일관성과 실용적 관점을 거듭 강조하고, 취임사에서도 이를 재확인한 것은 일단 일본 측에 긍정적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긴 호흡으로 오랜 숙제를 풀기 위해서는 우선은 일본과 흉금을 터놓고 마주 대할 공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마침 일본의 이시바 내각은 이재명 새 정부와 대화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그 가능성에 기대를 품고 있는 것 같다. 마침 이시바 내각이 북일 정상회담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도 기회로 삼을 수 있다.
한편 지난 7월 20일에 실시된 참의원 선거 결과가 한일관계에 미묘한 파장을 낳고 있다. 선거에서 자민당은 크게 의석을 잃고 패배했다. 책임론이 분출하는 가운데 당분간 이시바 수상의 리더십은 흔들릴 것이 예상된다. 소수여당으로서 야당과의 관계조율이 중요한 상황이다. 이런 일본을 상대하는 데 의원외교가 중요해졌다. 반면, 특별한 성과 없이 퇴임하는 불명예를 피하기 위해 이시바 수상이 외교에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한일관계라는 난제를 풀게 된다면 정권의 레거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침 7월 말에는 일한의원연맹의 방한이 예정돼 있다. 8월 15일은 일본의 패전으로 조선이 해방된 지 80년을 맞이하는 날이다. 향후 1개월이 포스트 1965년 체제 만들기에서 결정적인 시기가 될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아시아연구소나 서울대의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자 소개
남기정 (profnam@snu.ac.kr)
현)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소장(직무대리), 국회외교안보포럼 위원, (사)외교광장 사무총장
전) 현대일본학회 회장,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문재인 정부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주요 저서와 논문>
『基地国家の誕生ー朝鮮戦争と日本・アメリカ』 (東京堂出版, 2023)
『아베 시대 일본의 정치와 외교: 보수정치가 주도하는 국가혁신』 (박문사, 2022)
“분석도구로서 한국 민족주의론 고안을 위한 시론-상쇄 조합 구조의 형성과 고착화.” 『개념과 소통』 30(30), 2022.
“한일 1965년 체제 극복의 구조: 민주화-역사화해-평화구축의 트릴레마.” 『일본학보』 127, 2021.
“문재인 정부의 대일 외교와 한일 관계의 대전환: ‘장기 저강도 복합 경쟁’의 한일관계로.” 『동향과 전망』 112, 2021.
<최신관련자료>
박현주 (2025). “‘강제징용 해법’ 유지 질문에 ‘국가 간에는 정책 일관성 중요’.” 『중앙일보』 6월 5일.
NHK (2025). “参院選2025, 開票速報.” (접속일 2025년 7월 22일)
https://www.nhk.or.jp/senkyo/database/sangi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