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July 25, 2025

대한민국 새정부의 對 아세안 정책 방향에 대한 제언

미·중 전략경쟁이 심화하는 가운데 아세안은 지정학적 중요성, 경제적 역동성, 그리고 한국과의 활발한 인적교류를 바탕으로 한국 외교 다변화의 핵심 대상이다. 새로운 정부는 아세안을 ‘공동 미래 설계자’로 인식하고 안정적인 추진 체계를 갖추어 단계적인 외교·안보 협력, 아세안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지원하고 공급망을 다변화하는 경제 협력, 상호 이해 증진을 위한 사회·문화 협력 등 분야별 구체적인 전략을 수립하여 추진해야 할 것이다.

김동엽(부산외국어대학교)
2025년 5월 26일, 동남아시아 10개국의 정상들이 ‘제46회 아세안 정상회의’에 참여하였다. 출처: 연합뉴스

 

최근 미·중 전략경쟁의 심화로 지역 안보의 불안정성과 경제적 불확실성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복합적 위기 상황에서 특정 강대국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외교 전략의 다변화를 모색하는 것은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필수적 과제이다. 한국도 외교 다변화 전략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하며, 그 대상으로 동아시아 이웃 지역인 아세안의 중요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아세안은 인도양과 태평양의 중간 지점에 있는 지정학적 중요성과 함께, 6억 7천만 명(2024년)이 넘는 인구와 글로벌 경제 위기 속에서도 평균 4~5%대의 경제성장률을 나타내는 가장 역동적인 지역이다. 한국에도 아세안은 미국, 중국과 함께 3대 경제교류 대상이며, 제1의 인적교류 지역으로 국내 다문화 현상의 주요 주체이기도 하다. 한국이 아세안과의 관계를 심화하는 것은 단순히 외교적 선택지를 늘리는 것을 넘어, 국제사회에서 자율적이고 주도적인 중견국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핵심적인 전략이 될 것이다.

아세안의 중요성은 이미 과거 정부에서도 인식하고 전략적 접근을 시도한 바 있다. 문재인 정부의 신남방정책(NSP)과 윤석열 정부의 한-아세안 연대 구상(KASI)이 대표적이다. 신남방정책은 경제 협력을 넘어 가치 및 규범 외교를 강조하며 ‘3P 전략’(사람, 평화, 상생번영)을 중심으로 이전 정부와 차별화된 대 아세안 전략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정치·안보 분야에서는 여전히 주변 4강(미, 일, 중, 러) 중심 외교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역내 평화 촉진자로서 아세안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경제 분야는 여전히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으나, 실제로는 민간 기업 주도의 이익 창출 활동이 중심이었으며, 정부의 지원 전략은 상대적으로 미흡했다고 평가된다. 사회·문화교류 영역에서도 다양한 현안들이 존재했지만, 해당 분야 정책이 시장 논리에 치우치면서 사회적 가치와의 연계가 부족했다. 정책 추진 체계 측면에서 대통령 직속 ‘신남방정책 특별위원회’가 운영되었지만 전문성 부족과 부처 간 부조화로 창의적 신규 사업 발굴과 프로그램 간 유기적 결합에 문제점을 드러냈다.

윤석열 정부하에서 추진한 한-아세안 연대 구상은 내용적인 면에서 신남방정책과 큰 차별성이 없지만, 이전 정책의 발전적 계승이라는 측면을 강조하지 않음으로써 정책의 연속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했다. 추진 주체로서 외교부의 역할을 강조했지만, 이에 걸맞은 조직 강화와 권한이 제대로 부여되지 않음으로써 사업 조율과 추진에 구조적 한계를 드러냈다. 더욱이 한-아세안 연대 구상이 정부의 인-태 전략과 결합하면서, 대 아세안 정책이 인-태 전략의 하위 전략으로 인식되어 정책의 독립성을 훼손시켰다. 정책 추진에 있어서 최상위 리더십의 지속적인 관심과 의지가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윤석열 정부는 한·미·일 외교에 집중하여 상대적으로 아세안과의 고위급 관계를 지속하지 못했다. 중국, 일본 등은 정상 간 잦은 접촉과 통화로 지속적인 외교적 신뢰를 유지한 반면, 한국은 아세안 정상회의 외의 접촉이 드물어 정상외교의 연속성과 상징성이 부족했다. 그 결과 주요국 중 가장 늦은 2024년에 아세안과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CSP)를 수립함으로써 아세안 내 한국의 위상 저하와 관심 부족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 주었다.

새 정부의 대 아세안 정책은 이전 정부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책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도 미흡한 부분을 창의적으로 보완하여 한층 강화된 협력 전략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아세안에 대한 명확한 외교적 비전을 제시하고, 안정적이며 강력한 추진 주체를 수립하여, 장기적 관점에서 구체적 전략하에 세부 프로그램을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새 정부의 대 아세안 정책이 단순히 실용성만 강조하면 정책의 일관성과 지속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포용성 중심의 접근을 통해 한국 외교의 방향성과 가치를 내재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각 분야별 협력 전략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외교·안보 분야는 심화하는 강대국 전략경쟁에 대비한 전략적 다변화의 측면에서 아세안에 접근해야 할 것이다. 아세안 역시 미·중 전략경쟁과 글로벌 경제 불안정성에 대해 중립적 입장에서 국제규범을 강조하며 다자협력 체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은 이러한 아세안의 이니셔티브에 참여하거나 공동 주도하는 방식을 추구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안보 협력 문제는 타 국가에도 민감한 사안일 수 있으므로 단계적 접근이 요구된다. 초기에는 재난 대응, 보건, 기후, 식량 등 비전통 안보를 중심으로 신뢰 기반 협력 구조를 구축하고, 이후 점차 전통 안보 분야로의 확장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아세안이 주도하는 다자체제를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외교적 플랫폼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과 아세안확대국방장관회의(ADMM+) 등 지역 다자안보 협의체의 활성화를 위해 아세안과 긴밀히 협력해야 할 것이다. 2029년 한-아세안 대화 수립 40주년을 기념하는 한-아세안 특별 정상회의를 한국에 유치하여 한반도 평화와 통일 문제를 공식적 안건으로 제안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 한편 미·중 간의 전략경쟁 속에서 중견국 연합 구상이 필요하며, 한국·아세안·일본·호주 간 협력 틀을 구성하여 지역 경제 질서와 규범 기반 안보 질서 유지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경제 협력 분야에서는 중국 의존도 감소를 위한 공급망 다변화 전략과 미국의 관세 압력에 공동 대응할 파트너로서 아세안과의 협력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대 아세안 경제 협력은 일방적인 투자나 시장 확보를 넘어, 아세안 국가들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지원하고 상호 의존적인 공급망 생태계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추진해야 한다. 아세안은 2045 비전(ASEAN Vision 2045)을 통해 아세안 중심성(ASEAN Centrality)을 유지하며 외부 파트너들과 연계를 확대하고, 글로벌 무대에서 입지를 강화해 나갈 것을 천명하고 있으므로 한국은 아세안과 함께 국제 거버넌스 개혁에 공동 목소리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 향후 미·중 경쟁 장기화, 글로벌 무역 감소, 금융 불안정성 등을 고려해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및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과 같은 역내 다자무역체계의 확대 및 활성화에 아세안과 공동보조를 취해야 할 것이다.

사회·문화 분야 협력은 상호 이해와 신뢰를 증진하고 장기적인 관계 발전을 위한 기반 조성에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한국은 서구 자유주의 국가들이 취하는 가치 강요형이 아닌 공감과 공유형 접근 방식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 경험 공유는 역사적·문화적 맥락을 고려한 교육형 협력 모델로 제안할 수 있다. 근래 한류를 통해 아세안 국민들의 한국 문화에 관한 관심과 이해도가 높아지고 있지만, 아세안 사회와 문화에 대한 한국인의 이해는 여전히 편협하고 왜곡되어 있다. 국내 대학에서 아세안 지역에 관한 교육은 주변국인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하여 그 규모가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국가 전략적 차원에서 아세안 지역에 관한 연구와 교육 인프라 확대를 위한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

새 정부는 아세안을 외교 전략 다변화의 핵심축으로 설정하고, 자원과 역량을 집중하여 지속 가능하며 미래지향적인 접근 전략을 수립하여 추진해야 할 것이다. 아세안은 비전 2045를 통해, “회복력 있고 혁신적이며 역동적이고 사람 중심의 아세안 공동체를 실현하여 인도-태평양 지역 성장의 중심지로 만들 것”임을 천명했다. 한국은 아세안의 자체적인 미래 비전을 존중하고, 이를 한국의 대 아세안 정책과 연계하여 공동의 이익과 목표를 추구해야 한다. 무엇보다 아세안을 단순한 지원 대상이 아닌 ‘공동 의사결정 파트너’이자 ‘공동 미래 설계자’로 인식을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슈와 목적에 따라 아세안과의 다자 협력체제, 혹은 개별 회원국과의 양자 관계, 그리고 한-메콩이나 한-BIMP-EAGA와 같은 소다자 협력 등 다차원적인 접근을 통해 가장 효과적인 협력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국제 위상 제고 및 제3축 외교 강화를 위한 전략으로 아세안의 전략적 자율성과 한국의 글로벌 리더십을 접목하는 한-아세안 전략적 파트너십을 강화해 나가야 할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아시아연구소나 서울대의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자 소개

김동엽 (dykim@bufs.ac.kr)

현) 부산외국어대학교 교수, (사)한국동남아학회 회장, 부산외국어대학교 아세안연구원 원장

전) 한국아시아학회 회장

<최신관련자료>

곽성일 외 (2022). “아세안의 중장기 통상전략과 한-아세안 협력 방안.” 『중장기통상전략연구』 22-05,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김형종 (2024). “아세안 2023: 다양성과 분열.” 『동남아시아연구』 34(1), 1-32.

박민정 (2025). “아세안 2024: 적실성 회복을 위한 파편적 시도와 한계.” 『동남아시아연구』 35(1), 1-35.

이재현 (2024). “한-아세안 관계 35년의 회고와 전망.” 『아산리포트』 24-11, 아산정책연구원.

한-아세안센터 (2024). 『2024 한-아세안 통계집』. 한-아세안센터 정보자료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