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의 랩음악: 세계화와 지역적 변용을 중심으로

본 연구는 중앙아시아의 랩음악이 세계적으로 공유되는 힙합 장르 형식을 지역의 언어와 역사적 경험 속에서 어떻게 수용하고 변형해 왔는지를 살펴본다. 이를 위해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 세 나라의 언어환경과 문화정책, 음악 시장의 조건을 비교하고, 각국을 대표하는 래퍼인 Skryptonite, Shoxrux, Begish의 대표곡 가사를 함께 분석하였다. 분석 결과 중앙아시아 랩의 지역성은 전통악기나 선율을 얼마나 사용했는가로만 판단할 수 없으며, 어떤 언어로 어떤 경험을 노래하고 그것이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는 훨씬 넓은 문제와 맞닿아 있다. 아울러 세 나라에서 랩의 자리는 시장, 국가, 공동체라는 서로 다른 힘의 개입 속에서 저마다 다르게 마련되어 왔다.

갈라노바 딜노자(한국외국어대학교)
키르기스스탄 래퍼 Begish의 공연 장면
출처: Instagram(@begishzbp)

글로컬 힙합으로서의 중앙아시아 랩

20세기 후반 미국에서 시작된 힙합은 오늘날 어느 한 나라나 민족의 문화라고 말하기 힘들 만큼 널리 퍼진 세계적 대중문화가 되었다. 힙합의 핵심 표현 양식인 랩 역시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가면서 현지의 언어와 음악 전통, 사회적 조건과 만나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중앙아시아에 현대적 의미의 랩이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는 대체로 1990년대이며, 대중적 기반과 사회적 영향력이 눈에 띄게 커진 것은 2000년대에 들어서였다(Kaye & Tleshova, 2018).

중앙아시아의 랩을 서구에서 만들어진 장르가 그대로 옮겨 온 결과로 보기는 어렵다. 이 지역의 음악문화는 유목과 정주라는 서로 다른 생활방식, 이슬람 전통, 여러 언어와 민족이 뒤섞여 온 오랜 역사 위에 놓여 있고, 여기에 소련의 정치·문화 이데올로기와 근대화, 독립 이후의 전통문화 재발견과 세계화가 겹겹이 쌓여 왔다. 힙합 연구가 말하는 ‘글로컬(glocal)’ 언어 흐름의 관점은 이러한 층위를 다시 읽는 데 유용하다. Alim과 Pennycook(2007)은 힙합을 언어와 정체성, 교육이 얽히는 문화적 실천으로 규정하면서, 단일한 힙합 문화가 아니라 지역마다 다른 복수의 hip-hop culture(s)를 봐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본고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중앙아시아의 랩이 세계적으로 공유되는 장르 형식을 지역의 언어와 역사적 경험 속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바꾸어 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중앙아시아 청년들에게 랩은 세계 대중문화와 만나는 통로였고, 동시에 자신이 발 딛은 사회와 언어를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 전개 양상은 나라마다 사뭇 달랐다. 카자흐스탄에서는 큰 음악 시장과 러시아어권 문화권을 발판 삼아 국경 밖에서도 활동하는 래퍼들이 나왔고,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문화정책과 검열이 랩의 공개적 활동을 적잖이 제약했으며, 키르기스스탄에서는 비슈케크를 중심으로 소규모 공연과 랩 공동체가 서서히 자라났다.

중앙아시아 랩음악의 형성과 특징

중앙아시아의 현대 랩은 세계 힙합 문화의 일부이면서도, 소련 해체 이후라는 특정한 사회·문화적 조건 속에서 형태를 갖췄다. 소련 말기부터 외국 대중문화에 대한 접근이 빠르게 넓어졌고, 미국·유럽 힙합뿐 아니라 러시아 랩도 중앙아시아 청년들 사이에 빠르게 퍼졌다. 이 초기 단계에서 러시아어는 랩의 주요 표현언어였고, 동시에 여러 나라의 청중과 포스트소비에트 음악 시장을 이어 주는 언어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랩이 지역 대중문화로 뿌리내리면서 민족어와 지역적 경험이 차지하는 비중도 커졌다. 오늘날 중앙아시아 랩에서는 러시아어뿐 아니라 카자흐어, 키르기스어, 우즈베크어가 두루 쓰인다(Coppenrath, 2020). 어느 언어로 노래할 것인가는 단순한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음악가가 누구를 청중으로 상정하고 스스로를 어떤 문화적 위치에 두는지를 함께 드러내는 선택이다. Kaye와 Tleshova(2018)가 지적하듯 중앙아시아 랩을 하나의 고정된 양식으로 묶어 말하기는 어렵다. 전자 비트와 베이스라는 공통 기반 위에 지역 악기와 선율이 얹히고, 가사의 소재도 일상적 관계에서 정치·종교·젠더까지 폭넓게 걸쳐 있다. 지역성을 전통 요소의 양으로만 재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히려 세계적으로 익숙한 힙합 형식을 지역 청중이 공감할 수 있는 경험과 언어로 옮겨 가는 과정 자체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별 랩음악의 전개

카자흐스탄: 언어와 문화적 혼종성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에서 랩음악이 상대적으로 활발히 성장한 나라다. 1990년대 이후 러시아 힙합과 긴밀히 교류하며 시장을 넓혀 갔고, 그 결과 Skryptonite나 Jah Khalib처럼 러시아어권 전체에서 이름을 알린 음악가들이 나왔다. 카자흐스탄의 랩이 국내시장에만 머물지 않고 러시아어를 매개로 한 초국가적 음악공간과 이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Skryptonite는 그 대표적인 예다. 그는 주로 러시아어로 활동하며 러시아 음악산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음악적 배경을 카자흐스탄의 경험에서 떼어 놓지는 않는다. 그가 자란 북부 파블로다르와 청년기의 생활환경은 여러 곡에서 되풀이해 등장하는 소재다(Coppenrath, 2020). 그의 러시아어 사용을 지역적 정체성이 옅다는 증거로 읽기보다는, 카자흐스탄에서의 경험을 더 넓은 러시아어권 청중에게 전하기 위한 선택으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Solomon(2023)은 소비에트 해체 이후의 ‘러시아어권(Russophonia)’이라는 틀 안에서 카자흐스탄 랩을 살피며, 세계 힙합 문화와 러시아어, 카자흐의 시가·공연 전통이 만나는 지점에 주목한다. 이렇게 보면 러시아어는 지역적 소속감을 지워 버리는 언어라기보다, 포스트소비에트적 정체성을 표현하고 조율하는 자원에 더 가깝다.

그러나 러시아어 사용이 초국가적 소속을 항상 안정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카자흐스탄 출신 래퍼들의 언어 선택은 한층 복잡한 정치적 함의를 띠게 되었다. Boman(2025)에 따르면 Skryptonite는 침공 이전인 2021년의 한 인터뷰에서 푸틴을 호의적으로 평가한 바 있으나, 전면 침공 직후인 2022년 8월 러시아를 떠나 카자흐스탄으로 귀국하였다. 이후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 피해자를 돕는 자선공연에 참여하는 한편, 소셜미디어에서는 전쟁에 관해 명시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는 이른바 ‘전략적 침묵(strategic silence)’을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카자흐스탄을 포함한 러시아어권 청중과 점차 확대되는 서구 청중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상업적 조건에서 비롯된 태도로 볼 수 있다.

카자흐어 랩의 성장은 전통문화가 현대적으로 되살아나는 또 다른 경로를 보여준다. 카자흐·키르기스 유목사회에서 전해 내려온 즉흥 시가 경연인 아이티스(aitys) 전통(Köchümkulova & Qojakhmetova 2016)은 오늘날 카자흐어 랩에서도 즉흥성과 언어적 기지의 형태로 되풀이해 나타난다. 그 이면에는 카자흐어의 위상과 세대별 문화규범, 그리고 무엇을 ‘카자흐다운 것’으로 볼 것인가라는 물음이 함께 깔려 있다.

우즈베키스탄: 청년문화와 문화정책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랩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청년문화와 국가 문화정책의 관계가 유독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우즈베크어 랩은 젊은 층을 중심으로 빠르게 관심을 끌었지만, 그 인기가 높아질수록 이를 통제해야 할 서구 문화의 영향으로 보는 시선도 함께 늘었다. 정작 눈여겨봐야 할 것은 랩이 금지되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무엇을 ‘바람직한’ 대중음악으로 인정할 것인가를 두고 국가와 음악가 사이에 형성된 긴장 쪽이다. 이 점은 카자흐스탄의 사례와 뚜렷이 대비된다. 카자흐스탄에서 랩의 지역화가 주로 시장과 언어 선택이라는 음악가 개인의 판단을 통해 이루어졌다면,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그 판단의 여지 자체가 국가라는 또 하나의 행위자에 의해 상당 부분 규정되었던 셈이다. Alim과 Pennycook(2007)이 말하는 ‘글로컬’ 흐름이 이 지역에서는 시장의 논리뿐 아니라 문화정책이라는 제도적 여과를 함께 거쳐야 했다.

국가의 태도는 이후 통제에서 포섭으로 옮겨 가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2019년 국영 공연기획사 O′zbekkonsert는 래퍼들과 간담회를 열고, 그해 7월 우즈베키스탄 최초의 공식 랩·디제잉 페스티벌을 개최하겠다고 발표했다. 래퍼를 선발·평가하고 마스터클래스를 여는 한편, 온라인상 라이선스 취득 비용을 낮추는 등 활동을 제도적으로 지원하겠다는 계획도 제시되었다. 다만 이 지원에는 조건이 뒤따랐다. 향후 랩에서는 민족성과 전통, 이른바 조국을 ‘찬양하는’ 노래를 우선적으로 다루도록 권장되었고, 일부 참석자들은 국가가 주관하는 명절 행사에서 자신들이 계속 배제되고 있다며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Qalampir.uz 2019). 흥미로운 점은 이 개입이 랩을 억누르기보다 오히려 공식적인 자리를 마련해 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데 있다. 다만 그 자리에 들어서려면 음악가들은 소재와 어조를 국가가 승인하는 범위 안으로 스스로 조정해야 했다. 지원과 검열은 뚜렷이 구분되는 별개의 국면이라기보다, 하나의 제도적 개입 안에서 동시에 작동하고 있었던 셈이다.

우즈베키스탄 랩의 성장은 음악 시장의 논리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젊은 층에게 랩은 새로운 언어와 리듬을 실험하는 문화였지만, 공적 영역으로 나오는 순간에는 전통과 도덕, 국민문화에 관한 규범과 끊임없이 부딪히고 조정되어야 했다. 그런 만큼 우즈베크 랩의 역사는 외래 장르를 받아들였는가보다, 청년의 표현 욕구가 제도적 문화환경 속에서 어떻게 허용되고 또 제한되었는가에 관한 이야기에 더 가깝다. Kaye와 Tleshova(2018)의 지적처럼 중앙아시아 랩을 하나의 고정된 양식으로 묶어 말할 수 없다면, 우즈베키스탄의 사례는 그 다양성이 음악 형식 자체 못지않게 각국이 랩을 받아들이는 제도적 조건의 차이에서도 비롯된다는 사실을 잘 확인시켜 준다.

키르기스스탄: 공동체 중심의 랩문화

키르기스스탄의 힙합문화는 1990년대 후반 비슈케크를 중심으로 서서히 모습을 갖춰 갔다. Begish와 Bayastan처럼 키르기스어로 노래하는 래퍼들이 자라나면서 고향, 민족, 애국심 같은 지역적 주제가 한층 뚜렷해졌고, 음악시장 규모가 작아 랩만으로 안정적인 수입을 올리기 쉽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스트리밍과 디지털 유통이 새로운 청중과의 접점을 조금씩 열어 주었다. 앞의 두 나라와 다른 점이 있다면, 국가나 대형 산업의 뒷받침 없이 공연 공동체와 개별 음악가들의 자생적 활동이 랩의 성장을 이끌어 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유통 조건의 변화는 2020년 상반기 비슈케크에서 일어난 이른바 ‘저항 랩(protest rap)’ 물결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2019년 말 국제탐사보도언론협회(OCCRP)와 Kloop.kg 등이 세관 부패와 대규모 자금세탁 의혹을 폭로한 이른바 ‘마트라이모프(Matraimov) 사건’은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고, 이는 ‘리액치야(ReAktsiya)’로 불린 반부패 시위로 이어졌다. 같은 시기 여성폭력 문제에 대한 공분과 코로나19로 인한 봉쇄 조치도 사회적 불만을 키웠다(Coppenrath 2022). 이러한 흐름 속에서 2020년 5월 키르기스어 래퍼 Begish는 부패한 정치인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Саясат(정치)」를, 러시아어 래퍼 Ulukmanapo는 「Выстрел в пустоту(허공을 향한 총성)」를 각각 발표했다. 두 곡은 그해 8월까지 유튜브에서 합산 100만 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그동안 비슈케크 힙합계 안에 머물러 있던 저항 랩을 훨씬 넓은 대중에게 알렸다. 이후에도 부패, 이주노동, 여성폭력, 환경문제 등을 다루는 저항 랩이 잇따라 발표되었다(Coppenrath 2022).

Coppenrath(2022)는 이러한 현상을 래퍼들이 처한 경제적·정치적·사회적 ‘협상(bargaining)’ 조건의 변화로 설명한다. 스트리밍 플랫폼을 통한 직접적인 수익화가 가능해지면서 래퍼들은 라디오나 방송, 현지 음반사 등 기존 유통 채널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수 있었고, 이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곡을 발표할 때 감수해야 하는 위험을 줄이는 효과를 낳았다. 아울러 리액치야 시위를 계기로 여론이 점차 비판적으로 기울면서, 저항의 목소리를 공개적으로 내는 데 따르는 사회적 위험 역시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이런 점에서 2020년의 저항 랩 물결은 랩 장르 자체의 본질적 속성이라기보다, 유통 구조와 정치적 환경이 맞물려 만들어 낸 특정 국면의 산물에 가깝다. 우즈베키스탄에서 국가가 공식 무대를 내주는 대신 소재를 조정하게 했다면, 키르기스스탄에는 애초에 그런 뒷받침이 없었던 만큼 음악가 개인의 협상이 랩의 정치적 발언 범위를 정하는 데 더 직접적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대표곡을 통해 본 중앙아시아 랩의 지역적 변용

앞 절이 국가별 역사와 제도적 환경을 다뤘다면, 이번 절에서는 실제 가사를 통해 지역화가 작품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펴본다. 분석 대상은 카자흐스탄의 Skryptonite, 우즈베키스탄의 Shoxrux, 키르기스스탄의 Begish다. 세 음악가는 서로 다른 주제를 노래하지만, 세계적으로 공유되는 랩의 형식이 지역의 계층 경험, 민족적 기억, 정치적 현실과 각기 어떻게 만나는지를 비교하기에는 좋은 조합이다.

왼쪽부터 카자흐스탄의 래퍼 Skryptonite, 우즈베키스탄의 래퍼 Shoxrux, 키르기스스탄의 래퍼 Begish
출처: ChatGPT 생성 이미지

 

Skryptonite의 「Положение(상황)」: 계층 경험과 포스트소비에트 청년의 욕망

Skryptonite의 「Положение」에서 가장 먼저 주목되는 대목은 성장 환경을 돌아보는 부분이다. 화자는 자신이 자란 곳에서는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았다고 말하며, 꿈을 이루고 싶은 욕망과 빈곤한 현실을 나란히 늘어놓는다. 아버지의 노동,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 빚과 신용에 관한 이야기도 뒤이어 나온다. 개인의 성장담 안에 가족의 생계와 경제적 불안이 자연스럽게 스며 있는 셈이다. 이런 가사는 그의 청년기를 영웅적인 성공담으로만 그리지 않고, 제한된 조건 속에서 살아온 한 청년의 경험으로 담아낸다.

그러나 후렴에 이르면 곡의 정서는 뚜렷하게 전환된다. 대형 텔레비전, 비싼 장소에서 치르는 자녀의 결혼식, 가족을 위한 소비, 신용과 대출 같은 것들이 앞서 그려진 빈곤과 대비를 이루며 등장한다. 여기서 성공은 개인의 명성이 아니라 가족의 생활수준과 소비 능력이 얼마나 달라졌는가로 구체화된다. 힙합에서 흔히 보는 성공의 서사가 포스트소비에트 사회 특유의 가족생활과 신용경제라는 현실 속에서 다시 쓰이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어로 쓰인 이 경험담은 카자흐스탄의 지역적 삶을 러시아어권의 더 넓은 청중에게 이어 준다. 지역성과 초국가성은 서로 맞부딪히기보다, 같은 언어적 공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겹쳐 있는 셈이다. 물론 이러한 언어적 연결이 탈정치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2022년 이후 Skryptonite가 취해 온 전략적 침묵(Boman 2025)은, 그의 러시아어 사용이 카자흐스탄의 경험을 러시아어권 청중에게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쟁이라는 정치적 국면 속에서 여러 시장의 청중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부담과도 맞닿아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Skryptonite(Скриптонит) – Положение(상황) 

Shoxrux의 「O′zbegim(나의 우즈베크 민족)」: 민족적 기억과 일상적 가치의 랩적 표현

Shoxrux의 작품으로 오면 우즈베크어와 민족적 기억이 한층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Ozbegim」은 ‘Ozbegim(나의 우즈베크 민족)’, ‘millatim(나의 민족)’, ‘gururim(나의 자부심)’이라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우즈베크인이라는 소속감과 민족적 자긍심을 앞세운다. 여기에 Ibn Sino(이븐 시나), Naqshband(나크시반드), Ulugbek(울루그베크) 같은 역사·문화적 인물과 Samarqand(사마르칸트), Buxoro(부하라), Xiva(히바) 같은 도시 이름도 함께 등장한다. 랩 가사 속에서 역사적 인물과 장소가 지금의 민족적 자기인식을 만들어 가는 자원으로 쓰이고 있다. 다만 이 곡에서 ‘우즈베크다움’은 역사적 영광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부모에게서 받은 교육과 가르침에 대한 고마움, 좋은 태도, 관용과 용서 같은 가치 역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런 덕목은 조상에게서 부모로, 다시 자녀에게로 대물림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정리하자면 「Ozbegim」은 민족정체성을 거대한 역사와 일상적인 가족윤리라는 두 층위에서 함께 쌓아 올린다. 세계적으로 유통되는 랩의 형식이 우즈베크 사회의 자기서술을 담는 그릇으로 쓰인다는 점에 이 곡의 지역적 의미가 있다.

Shoxrux – O′zbegim(나의 우즈베크 민족)

Begish의 「Саясат(정치)」: 키르기스 사회문제와 청년의 정치적 발화

Begish의 「Саясат」은 앞의 작품들에 비해 정치적 발언의 수위가 훨씬 높다. 제목부터 ‘정치’를 뜻하는 이 곡은, 국민의 기대를 등에 업고 권력을 쥔 정치인이 그 기대를 저버리는 상황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작은 키르기스스탄의 미래’를 빼앗지 말라는 호소는 특히 눈여겨볼 만한데, 이 호소는 비판의 화살을 특정 권력자 한 사람에게만 향하지 않고 국가와 다음 세대의 문제로까지 넓힌다. 이 곡은 2020년 5월 8일 유튜브를 통해 공개되었으며, 앞서 살펴본 저항 랩 물결의 첫 정점에 해당한다. Begish는 이미 키르기스스탄에서 널리 알려진 인기 래퍼였다는 점에서, 「Саясат」은 비슈케크 힙합 공동체를 넘어 폭넓은 대중에게 가닿은 최초의 저항 랩으로 평가된다(Coppenrath 2022). 아울러 Begish가 이 곡에서 구사하는 랩의 흐름(flow)은 일곱 음절 단위로 끊어지는 압삭(aksak) 운율을 따르는데, 이는 마나스 서사시를 비롯한 키르기스 전통 시가와 아큰(akyn) 즉흥 가창에서 발견되는 운율 구조이기도 하다(Coppenrath 2022). 카자흐스탄의 아이티스 전통이 현대 랩에 스며드는 방식과도 비교할 만한 대목이다.

비판의 소재 역시 구체적이다. 도로와 주택 건설, 토지, 가스, 금, 국가재정이 곡 내내 반복해서 언급되고, 의료진의 열악한 처우와 낮은 임금, 국경 밖에 남겨진 국민이 겪는 어려움도 함께 다뤄진다. 화자는 자신의 이익이나 인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의 목소리를 노래에 담는 것이라고 밝힌다. 이 지점에서 래퍼는 개인적 감정을 토로하는 인물을 넘어, 사회의 불만을 대신 말해 주는 발화자로 자리를 잡는다. 「Саясат」이 키르기스어로 키르기스스탄의 정치·경제 문제를 직접 다룬다는 점에서, 지역성은 전통악기의 사용보다 가사의 언어와 내용에서 훨씬 뚜렷하게 나타난다.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는 저항적 랩의 방식을 빌려 오되, 그 안에 현지 사회가 마주한 문제를 채워 넣은 셈이다. Begish의 사례를 보면, 중앙아시아에서 랩이 청년 오락문화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비판과 공적 발언의 수단으로도 기능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Begish – Саясат(정치)

중앙아시아 랩음악의 문화적 의미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기르기스스탄 등 세 나라의 사례를 나란히 놓고 보면, 중앙아시아 랩의 지역성을 전통 요소가 얼마나 쓰였는가로만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카자흐스탄에서는 아이티스와 전통악기의 음향이 현대 랩에 녹아들어 가는 한편, 러시아어 랩을 통해 지역의 생활 경험이 더 넓은 청중에게 가닿기도 한다. 키르기스스탄에서는 분쟁과 정치 변화, 경제적 어려움이 가사의 주된 소재가 된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민족과 가족의 가치가 작품 곳곳에 나타나는 동시에, 랩의 표현 범위를 둘러싼 문화정책이 이 장르의 사회적 위치를 계속 흔들어 놓았다. 지역화란 결국 전통적인 소리를 얹어 넣는 문제만이 아니라, 어떤 언어로 어떤 경험을 말하고 그것이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까지 포함하는 훨씬 넓은 문제인 셈이다.

언어 선택은 이 차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요소 가운데 하나다. 러시아어는 소련 해체 이후에도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를 이어 주는 문화적 매개로 남아 있고, 더 큰 음악시장에 다가설 수 있는 실용적인 언어이기도 하다. 반면 카자흐어, 키르기스어, 우즈베크어는 지역 청중과 더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데 유리하다. 그러므로 러시아어와 민족어를 정체성의 강약으로 단순히 나누기보다는, 음악가가 활동 범위와 청중, 작품의 주제에 따라 골라 쓰는 서로 다른 언어 자원으로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국가와 랩 음악가 사이의 관계 역시 나라별로 다른 논리를 따른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국가가 랩을 직접 규율의 대상으로 삼아 왔으나, 그 방식은 단순한 금지에서 재정적·제도적 지원을 매개로 한 포섭으로 점차 옮겨 갔다(Qalampir.uz 2019). 키르기스스탄에서는 국가기관의 개입이 상대적으로 약한 대신, 스트리밍 플랫폼이 열어 준 경제적 자율성과 사회적 여론의 변화가 맞물리면서 래퍼 개개인의 협상을 통해 저항적 내용이 공적 영역으로 나올 수 있었다(Coppenrath 2022). 반면 러시아어권 시장에 깊이 편입된 카자흐스탄의 래퍼들은 2022년 이후 전쟁이라는 지정학적 위기 속에서, 특정 정치적 입장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기보다 전략적 침묵과 모호함을 통해 여러 시장의 청중을 동시에 관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Boman 2025). 랩이 지역사회 및 국가와 맺는 관계는 결국 국가 주도의 문화정책, 청년층의 자생적 협상, 그리고 초국가적 시장에서의 정치적 위험 관리라는 서로 다른 논리가 나라마다 다르게 조합된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다.

언어·국가·시장이 만든 세 갈래의 지역화: 랩이 지역사회를 말하는 방식

1990년대 이후 퍼진 랩은 디지털 미디어의 성장과 맞물려 청년층의 주요 대중문화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지만,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에서 걸어온 길은 저마다 달랐다. 카자흐스탄에서는 러시아어권 시장과 이어진 초국가적 활동과 카자흐어 및 전통문화의 재해석이 함께 나타났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우즈베크어 랩이 성장하는 동안 문화정책과 표현의 범위를 둘러싼 긴장이 줄곧 중요한 조건으로 작용했다. 키르기스스탄에서는 비슈케크의 공연 공동체에서 시작된 랩이 키르기스어 사용과 디지털 유통을 발판 삼아 새로운 청중을 넓혀 왔다.

대표곡의 가사에서도 이 차이는 그대로 확인된다. Skryptonite는 빈곤과 소비, 가족의 생활을 통해 포스트소비에트 청년의 계층 경험을 드러내고, Shoxrux는 우즈베크어와 역사적 기억, 가족윤리를 한데 엮는다. Begish는 키르기스어로 국내 정치와 경제 문제를 직접 겨눈다. 요컨대 중앙아시아 랩의 지역성은 하나의 방식으로 수렴되지 않으며, ‘포스트소비에트’라는 말 하나로 이 지역 청년의 정체성을 뭉뚱그릴 수도 없다. 정작 중요한 것은 서구 힙합을 얼마나 닮았는가가 아니라, 이미 세계적으로 유통되는 음악형식 안에 현지 음악가들이 어떤 언어와 기억, 생활 경험을 채워 넣는가이다.

본 연구는 작품 분석은 앞서 밝힌 기준에 따라 목적 표집된 세 편의 대표곡에 한정되어 있고, 주로 가사와 서사에 초점을 맞췄다는 한계가 있다. 앞으로는 더 많은 카자흐어·키르기스어·우즈베크어 가사를 대상으로 운율과 코드스위칭을 비교하고, 여성 래퍼와 젠더 담론, 전통음악을 차용하는 방식, 스트리밍 플랫폼을 통한 초국가적 유통까지 함께 들여다볼 필요가 있으며, 현지 인터뷰나 참여 관찰에 기반한 후속 연구가 이러한 한계를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소개

갈라노바 딜노자(dilnoza.temurovna@gmail.com)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이다.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원에서 다문화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호남대학교에서 ‘기초 우즈베크어’, ‘중앙아시아의 이해’, ‘아시아사회의 이해’, ‘한국사회의 다문화현상 이해’ 등을 가르쳐왔다. 주로 이중언어 교육, 국내 대학 우즈베키스탄 유학생 및 재한 우즈베키스탄 노동자 관련 연구를 진행하며, 상호문화소통 관련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출판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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