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태국-캄보디아의 국경 분쟁은 군사 충돌을 넘어, 양국 정치와 아세안 지역 질서의 불안정성을 부각시켰다. 특히 이 과정에서 훈 센 전 캄보디아 총리의 통화 유출은 외교 신뢰, 국내 정치, 그리고 역내 외교에 중대한 파장을 남겼다.
- 국경 분쟁의 배경과 전개
분쟁의 단초는 2025년 5월 28일, 캄보디아·태국·라오스 3국이 맞닿는 ‘에메랄드 삼각지대’ 인근,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 인근에서 촉발됐다. 양국 군 교전으로 캄보디아 군인 1명이 사망하자, 갈등은 7월 24일 따 무앙 톰 사원 부근에서 대규모 무력 충돌로 번졌다. 이 과정에서 캄보디아는 BM-21 로켓포를, 태국은 F-16 전투기를 투입해 긴장이 고조됐다. 무력 충돌은 국경 12개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38명의 사망자와 30만 명에 달하는 이재민이 발생했다. 7월 28일, 아세안 의장국 말레이시아와 미국, 중국 등의 중재로 양국은 조건 없는 즉각 휴전에 합의하며 사태가 일단락되었다. 이러한 분쟁의 근저에는 강대국들이 자의적으로 그은 국경선 문제, 모호한 경계선에서 비롯된 지속적 갈등, 고대 유적지를 둘러싼 소유권 분쟁과 민족주의적 동원, 국제 분쟁 처리의 모호한 판결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 훈 센의 통화 유출 사건과 정치적 파장
무력 충돌 그 자체보다 더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은 6월 18일 훈 센이 패통턴 친나왓 당시 태국 총리와의 통화 내용을 전격 공개한 사건이었다. 공개된 통화에서 패통턴은 훈 센을 “삼촌”이라고 부르며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처리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캄보디아에 제공되던 물과 전기 공급을 중단했던 것을 사과하고, 국경 무역 재개를 보장했다. 더 문제가 된 발언은 국경 지역 태국군 사령관을 “우리와 반대편”이라 지칭하고, 군부가 “멋져 보이기를 원하”며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비난한 부분이었다. 즉, 현직 총리가 국경 분쟁 상대국 지도자에게 자국 군 지휘부를 사실상 ‘적대 세력’이라 칭하며 험담을 한 것이다. 통화 내용 유출에 대해 패통턴은 훈 센이 신뢰와 외교 규범을 위반했으며 양국 관계보다 자신의 인기를 위해 이를 공개했다고 반발했다. 반면 훈 센은 “오해와 왜곡”을 피하기 위해 대화를 정기적으로 녹음한다고 주장했다.
훈 센의 폭로는 태국 정계를 뒤흔들었다. 총리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고, 10여 개 정당으로 구성된 연정에서 제2당인 품짜이타이당이 탈퇴했다. 헌법재판소는 7월 패통턴의 직무를 정지시켰고, 8월 29일 결국 해임을 결정했다. 이로 인해 2014년 군부 쿠데타 이후 두 차례 선거를 거치며 안정을 찾아가던 태국 정치는 다시 혼란 속에 빠졌다. 군부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또 다른 쿠데타 가능성까지 거론되었다. 한편 2006년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망명 이후에도 꾸준히 선거에서 승리하며 네 명의 총리를 배출했던 친나왓 일가의 정치적 영향력도 사실상 막을 내렸다는 평가도 나왔다.
- 훈 센의 동기와 정치적 계산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큰 의문은 왜 훈 센이 통화 내용을 유출했는가 하는 점이다. 훈 센은 망명 중이던 탁신을 정치 자문으로 임명하고, 자신의 자택에 탁신을 위한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줄 정도로 각별한 관계였으며, 패통턴이 훈 센을 “삼촌”이라 부를 정도로 훈 센과 친나왓 일가는 오랜 친분을 유지해 왔다. 이런 관계를 무너뜨릴 만한 폭로의 동기에 대해 몇 가지 음모론과 정치적 해석이 있다.
우선 태국 정부의 카지노 합법화 계획이 캄보디아 카지노 산업에 타격을 주고, 캄보디아 정치·경제 엘리트들이 누려온 불법 자금원이 사라질 것을 우려해 탁신 일가의 몰락을 도모했다는 주장이다. 또한 패통턴 정부가 벌이던 미얀마·캄보디아 국경 불법 사기 센터 단속에 반대한 캄보디아 정·재계의 이해관계가 작용했을 가능성이다. 지난 5월에 발간된 한 보고서에서 캄보디아 고위 인사들이 인신매매, 사이버 범죄, 자금 세탁 등 불법 사기 센터 운영에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지적된 바 있다.
정치적 해석은 보다 직접적이다. 패통턴의 지적처럼 훈 센은 이번 유출을 통해 캄보디아 국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할 수 있었다. 국경 분쟁은 캄보디아인의 민족주의를 자극하며 내부 결속을 다지는 데 효과적이었다. 실제로 6월 18일 프놈펜에서 열린 친정부 연대 행진에는 15만 명이 참여했고, 한 조사에서는 국민의 90% 이상이 정부의 대응을 지지한다고 답했다 . 이러한 상황에서 통화 내용의 유출은, 훈 센의 입장에서는, 그간 야당이 제기해 온 ‘탁신 일가와의 유착 때문에 영토 문제에서 미온적이었다’는 비판을 반박할 강력한 카드였을 것이다.
또한 훈 센 개인의 정치적 생존 전략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 훈 센은 2023년 아들 훈 마넷에게 총리직을 물려주고 퇴임한 이후에도 여전히 캄보디아 정치의 실질적 권력자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들 훈 마넷 총리 체제의 안정성과 장기적 통치 기반은 아직 확고하지 않았다. 국경 분쟁을 둘러싼 강경한 지도자의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훈 센은 아들에게 정치적 후광을 더해 주는 동시에 자신 역시 여전히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임을 과시했다. 이는 권력 이양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퇴진 이후 훈 센의 영향력’에 관한 의문에 답하는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훈 센 특유의 정치 스타일을 간과할 수 없다. 그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행보와 도발적 언사로 주목을 끌어왔으며, 이러한 돌발적 공개는 그간의 정치적 레퍼토리와 일맥상통한다. 즉, 훈 센의 폭로는 단순한 외교적 실수나 충동적 행동이 아니라, 국내 정치적 효과, 국제 여론전,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유산을 동시에 고려한 복합적 계산의 산물일 가능성이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마키아벨리적 본능의 극치”라고 보기도 한다.
- 외교적 후폭풍과 아세안에 미친 영향
이번 통화 유출 사태가 캄보디아에 유리하게만 작용할지는 조금 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국내적으로는 훈 센의 돌발적 행보가 아들 훈 마넷 정부의 안정적 통치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공식 직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훈 센이 여전히 외교적 전화를 받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은, 국정 운영의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권력만 행사하는 모순적이고 기형적인 체제를 더욱 고착화시킬 것이다.
외교적으로는, 정상 간 대화를 녹음하고 공개한 행위가 외교 기밀 유지라는 국제적 관행을 정면으로 위반한 심각한 신뢰 훼손이 되었으며, 그 결과 캄보디아의 외교적 평판은 물론 동남아 지역 내 입지와 국제 사회에서의 이미지에도 부정적 영향을 초래했다. 특히 경제적‧외교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던 태국과의 신뢰는 크게 흔들렸고, 다른 국가들 또한 앞으로 캄보디아와의 협력 과정에서 민감한 정보 공유를 꺼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번 통화 유출 사건이 아세안(ASEAN) 차원에 미친 파장도 결코 작지 않다. 정상 간 신뢰와 기밀 유지를 기반으로 하는 비공식 네트워크, 즉 ‘아세안 방식’의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인접국 지도자를 겨냥한 ‘통화 유출’은 지역 협력의 근간인 상호 신뢰를 크게 약화시켰으며, 이로 인해 캄보디아는 아세안 내에서 ‘믿을 수 없는 파트너’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장기적으로는 아세안 합의와 중재 메커니즘의 신뢰도와 효율성까지도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다.
결론
이번 사건은 단순한 국경 분쟁을 넘어, 캄보디아와 태국 양국 정치의 불안정성과 아세안 방식 외교의 취약점을 동시에 드러낸 사례라 할 수 있다. 훈 센의 통화 유출은 단기적으로는 국내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민족주의적 지지를 결집하는 효과를 거두었으나, 외교적 신뢰와 장기적 국가 이익을 훼손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결국 이번 사태는 동남아 지역 정치가 여전히 개인 권력자의 이해와 국내 정치적 계산에 좌우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자 비공식적 외교 관행이 국가 간 신뢰와 지역 질서를 얼마나 쉽게 흔들 수 있는지를 드러내는 경고로 남을 것이다.
저자 소개
박진영(jinipa2014@gmail.com)
현) 전북대 동남아연구소 공동연구원, 한-아세안협력기금사업 프로그램 매니저
전) 전북대 동남아연구소 전임연구원, 펜실베니아주립대학 연구교수
<주요 저서와 논문>
“캄보디아 2024: 세습 권력의 연착륙.” 『동남아시아연구』 35(1), 2025.
“Teachers’ union revitalisation through business unionism: a case study of the South Korean teachers’ union movement.” Globalisation, Societies and Education 23, 2025.
『동남아시아, 아래로부터의 건강보장』 (공저), (솔과학, 2025).
『미얀마 위기의 안과 밖: 3년의 여정을 돌아보다』 (공저), (정한책방, 2024).
“캄보디아 노사관계 제도의 구축과 국제 사회의 개입: 성과와 한계를 중심으로.” 『동남아시아연구』 33(4), 2023.
<최신관련자료>
Hutt, David (2025). “Cambodia’s Machiavelli on the Mekong Strikes Again.” The Diplomat, June 20. (접속일 2025년 9월 4일)
Hutt, David (2025). “Why Did Hun Sen Call For Regime Change in Thailand?” The Diplomat, July 1. (접속일 2025년 9월 4일)
Lam, Vu (2025). “Personality over protocol: Thailand-Cambodia tensions reveal ASEAN’s quiet crisis.” The Interpreter, June 26. (접속일 2025년 9월 4일)
Stalin, Ayadoure (2025). “Thai-Cambodia Border Conflict and Colonial Legacies.” Modern Diplomacy, June 8. (접속일 2025년 9월 4일)

